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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벽 눈길 그리고 첫 선물' - 신용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1-25 조회 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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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 밤은 포근했다. 온 누리가 눈에 덮여 고즈넉이 가라앉은 밤, 어둠도 삼가는 듯 환한 밤이면 마을은 성스럽기조차 했다. 겨울의 풍요를 만끽하는 축복의 시간들이다.

그날 밤도 함박눈이 내렸다. 잠을 깨니 콧등에 싸한 냉기가 덮쳐왔다. 어느 때인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어둠에 익숙해지니 창호지 바른 창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츰 방구석이 밝아지는 느낌으로 눈이 온 걸 알 수 있었다. 언니와 함께 자던 이불 속을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방문을 열고 봉당으로 내려섰다. 눈이 부셨다. 은빛 세상, 눈이 온 후의 정적이 가득했다.
가끔 환한 달빛이 마을을 비추고 있을 때도 눈이 왔나 싶어 땅바닥을 만져보던 기억이 살아났다. 마을은 눈 속에 묻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환하게 깨어 있었다. 아마 새벽이었을 게다.
나는 그 정적을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마당에 발을 디뎠다. 그리곤 눈이 그친 새벽의 대기를 심호흡했다. 실핏줄까지 맑아지는 듯했다.

마당가에 세워 둔 넉가래를 들고 눈길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착한 일을 하고 싶었다.
우리 집은 마을과 떨어진 언덕배기 예배당 옆이었다.
마을에서 올라오는 비탈길과 예배당까지 길을 내고 비질을 했다. 내가 마을과 통하는 길을 내고 누군가 생눈을 뚫지 않고 이 길로 온다면 기분이 좋을 거란 생각에 들떠 있었다.
예배당 돌층계를 쓸 때 나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을 느꼈다.
그건 응달에 비추는 햇살 같은, 어쩌면 시간이 멈춰선 그런 순간이었다.

뒤통수가 켕겨서 고개를 들자 거기엔 언제 오셨는지 개울 건너 젊은 목사님이 서 계셨다. 그분은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20대의 청년전도사였으나 우리는 목사님이라 불렀다.
나는 마음을 들킨 부끄러움에 겨웠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착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열두어 살배기 계집아이의 순수와 새벽기운이 어우러졌다.
“이젠 그만해도 돼요”
그분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그건 먼 곳에서의 울림이었다. 나는 입속으로만 “네” 하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창호문을 밀치고 윗방으로 들어가 곤히 자고 있는 언니 옆, 따스한 이불 속으로 쏘옥 몸을 눕혔다. ‘아마 목사님은 내가 누군지 모를 거야’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젊은 목사님이 새벽기도에 온 걸 알게 된 건 훨씬 뒤였다. 그 겨울 서울에서 산골마을 예배당에 온 총각목사는 온 동네 처녀들의 우상이었다.
개울 건너 교회선생님네 집에서 기거하던 목사님을 만난 것은 그렇게 새벽 눈길 위에서였다.

나는 그 해 성탄전야에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식전 인사말을 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분홍 저고리와 깜장치마를 입고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모인 예배당에서.
늘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타던,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나는 목사님의 굄을 받았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잠결에 듣는 새벽 종소리가 더없이 좋아졌다. 산골마을의 하루를 깨우듯 은은하고 맑게, 둥글게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 종을 치는 목사님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했다.

“얘야, 빨리 나와봐”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날도 밖에는 눈이 내려 하얀 솜이불을 덮은 듯했다. 우리 집 봉당에 놓인 세숫대야에 선물꾸러미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뭐야?”
“네 선물인가 보다”
“와!” 난생 처음 받아보는 선물에 신이 났다.
궁금한 마음을 안고 포장을 뜯으니 한 묶음의 공책과 처음 보는 하늘색 뿔필통이 들어 있었다.

필통을 여니 곱게 접힌 편지가 있었다. ‘용자에게’로 시작되는 그 글은 세상에서 처음 내 존재를 확인케 해주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써 주었다는 사실에 내 기쁨은 터질 지경이었다. 공책 한 권 구하기 힘든 그 시절, 학용품을 선물 받은 기쁨보다 종이 한 장에 쓰인 메시지가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곤 편지를 손안에 꼭 쥔 채 눈 덮인 빈 들판을 마구 뛰어다녔다.
만나는 친구에게마다 의기양양 자랑을 했다. 그 겨울, 편지는 내 손안에서 닳아 없어졌다. 그렇지만 그 겨울은 따뜻했다.
그날 아침, 목사님은 교회에서 우리 집 마당까지, 또 마을로 내려가는 눈길을 쓸고 내게 선물을 남긴 채 서울로 떠나갔다.
무언 속에 우리가 낸 새벽 눈길, 그 길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내 유년의 길로 닿는다. 
목사님도 눈길을 쓸던 그 해 겨울 새벽을, 그 눈길에서의 만남을 기억하실까?

하늘색 뿔필통을 학교에 가져간 나는 짝인 사내아이에게 자랑했다.
“이건 아주 좋은 거야. 서울서 사온 거래”
“정말?”
내 짝은 처음 보는 뿔필통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빛냈다.
“그래, 깨지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는다”
“칼로 찢어도?”
“그래”
그러자 그 애는 자기 칼을 꺼내 필통을 죽 그었다. 하늘색 예쁜 뿔필통 뚜껑은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살이 베어지는 아픔을 참느라 나는 눈을 꼬옥 감았다.
“네가 하랬다 뭐!”
그 애가 당황해서 외쳤다.
“그래”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머리를 끄덕였다. 슬프진 않았다. 그까짓 필통을 망가뜨렸다고 마음속에 남은 첫 선물, 그 경이로운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이후 이기덕 목사님은 교회로 편지를 보낼 때면 꼭 내 안부를 물었고 교회 언니들은 부러운 듯 그 말을 내게 전해주곤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 세월의 무게에도, 거리에도 내 유년의 동화는 오롯이 깨어 있다.
그해 겨울 나는 행복했고, 세상은 아름다웠다.


신용자/출판인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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